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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기독교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서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믿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리스도인치고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겠지만, 분명히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을 자기들의 생각에 맞추어 믿으며, 자기들의 신학 체계에 맞추어 믿는다. 심지어 성경의 본문을 바꿔 가면서까지 자기들의 신학 체계와 같지 않는 부분은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비유적으로 해석해 버리고, 성경에는 모순도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제시된 기본적인 개념만 옳은 것이며, 나머지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반면 비록 소수지만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를 존중하고, 모든 가르침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으며, 모든 예언들에 대해서도 문자적으로 정확히 성취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바로 세대주의자들이다. 비록 그들 중에는 성경을 잘못 연구해서 다소 틀리게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적어도 그들은 성경에 대해 이러한 자세만큼은 견지하는 자들이다. 다른 체계(예컨대 무천년주의)에서는 분명히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요한계시록 20장의 천 년을 문자적인 천 년으로 믿지 않으며, 이사야 43장의 이스라엘을 문자적인 이스라엘로 믿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세대주의자들이 요한계시록이나 예언서들의 일부 구절들만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매우 편협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이 300개라면 재림에 대한 예언이 500개라는 점, 그리고 성경의 약 4분의 3이 유대인과 그리스도의 왕국을 다루고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해 본다면, 예언에 대한 문자적 해석 문제가 결코 협소한 부분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논점임을 인정해야 한다.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경영방침

 

 사실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라는 이름은 잘못 번역된 말이다. 사람들은 보통 세대주의에 대해, 성경을 몇 개의 시대로 나누는 체계 정도로만 생각한다. 물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몇 개의 시대로 나뉘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세대주의"라는 말로 불리기에는 조금 어색하다. 일단 "세대"(generation)라는 말은 "시대"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대는 기간을 나타내기 보다는 오히려 일단의 대상, 즉 사람들을 가리킨다. 굳이 시대와 연결시킨다면, 그 시대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세대주의라고 번역한 "dispensationalism"은 "분배하다" (dispense)라는 의미가 있다. 이 말에 대한 고전적인 의미는 약사가 약을 조제할 때 어떤 성분의 약을 얼마나 넣고, 처방전에 맞게 잘 분배하는 것이다. 그러면 신학적인 의미의 "dispensation"은 무엇을 분배한다는 말인가? 시대가 나뉘어지기는 나뉘어지는데, 무엇에 따라 나뉘어지는 것인가? 바로 하나님의 경륜이다. 경륜이란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경영 방침인데, 이 경영방침이 각 시대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신학 용어화가 되었으니 세대주의라고 부르는 것이지, 이에 대한 바른 정의는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경영 방침"이다.

물론 약사가 약을 함부로 분배하여 조제하면 안 되듯이, 경륜 또한 함부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이 경륜을 아무렇게나 나누면 성경을 난도질하는 것이 되며, 아예 나누지 않으면 성경이 모순 투성이가 되어,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친히 이 "나눔"에 대해 명령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디모데후서 2:15에 있는 것과 같이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라는 명령이다. "공부하라"는 명령도 <한글킹제임스성경>과 영어 <킹제임스성경>에만 있거니와, "나누라"는 명령 또한 변개된 성경들에는 없고, 바른 말씀인 <한글킹제임스성경>과 영어 <킹제임스성경>에만 있는 명령이다. (한글개역성경에는 "분별하여"라고 되어 있는데, 본문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나누라"는 말은 "사랑을 나누자," "은혜를 나누자" 할 때의 그런 "나눔"(share)이 아니라, 쪼개고 분리하는 의미의 "나눔"(divide)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적절하고 올바르게 분리해서 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나누어야 하는가? 그것은 시대들과 대상들(사람들)이다. 시대들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율법 시대, 교회 시대, 왕국 시대 등의 일곱 시대를 말하고, 대상들이라 함은 유대인과 이방인과 교회라는 세 그룹을 말한다. 성경은 창세기 1:1부터 요한계시록 22:21까지 모두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모든 구절들이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해 기록된 것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10:32에서도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성경은 세 그룹의 사람들을 제시한다. 구약성경에 보면 필리스티아인, 아말렉인, 에돔과 모압인, 투로와 시돈인, 앗시리아인, 바빌론인 등 수많은 민족들이 나오지만, 그 모든 민족들은 하나로 묶여 "이방인"이라 불린다. 왜 이들이 하나로 묶이느냐 하면, 모두가 유대인들을 대적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과 그들을 대적하는 이방인들로 나뉘어진다. 신약에 이르면 거기에 또 하나의 그룹이 추가되는데, 바로 교회이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출신 성분으로 하자면 유대인도 있고 이방인도 있지만, 일단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게 되면 더 이상 유대인이나 이방인으로 불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불린다.

성경에 있는 사람들이 세 부류로 불려진다면, 하나님께서도 이 셋에 따라 각기 다른 말씀을 하신다. 유대인은 택함받은 민족이지만 그들의 범죄로 징계를 받게 되고, 그후에 회복된다(롬 11장). 이방인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과 또 메시야를 대적하다가 멸망하게 된다(시 2편, 단 2:44).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후에는 영광으로 들어가게 된다. 율법은 구약 시대 유대인들을 위한 규례로 주어졌고, 복음은 신약 교회를 위해 주어졌다. 신약 교회는 구약 율법을 지키지 않으며, 반대로 구약의 유대인들은 신약 교회처럼 "자유함"으로 행하면 안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나누지 않으면 성경은 온통 모순 투성이가 된다. 예를 들어, 구약에 있는 수많은 명령 중에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음식에 관한 규례가 있다(레 11:8, 신 14:8). 성경에 관한 모든 규례들이 문자적으로 지켜져야 한다면 우리 또한 이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명령을 지키지 않는가? 지키지 않으면서도 불순종했다는 죄책감을 왜 느끼지 않는가? 그것은 {그러므로 음식으로나 마시는 것으로나 거룩한 날이나 새 달이나 안식일들에 관해서는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골 2:16) 등, 음식에 관한 규례들이 무의미하다는 신약성경의 말씀 때문이다. 이외에도 많은 율법적인 규례들을 우리는 지키지 않는다. 이유는 그것이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구약 율법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도 그 규례들이 무가치했겠는가? 그렇지 않다. 율법이 비록 우리에게는 그림자에 불과하지만, 그들에게는 실제였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되었다.


문자적 해석 - 성경공부의 기본

 

 이것이 바로 성경을 나누는 기본이다. 하지만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이 정도만 나뉘어진다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우리가 더 나눠야 하는 것들은 구약이 어디서 끝나고, 신약이 어디서 시작되며, 율법은 어디서 시작되고, 율법 이전에는 어땠으며, 또 신약은 어디에서 종료되고, 그 다음에 펼쳐질 경륜들과 그 각각의 경륜들에 맞는 교리들과 또 규례들은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모든 것들을 올바로 나누기 위해서 "공부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본 코너에서는 앞으로 성경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해 감에 따라 이 모든 것들을 올바로 나누어 갈 것이다.

세대주의를 공부할 때(아니, 어떠한 류의 성경 공부 자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와 대상들을 나누는 것 외에도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교리적 적용이다. 문자적 해석은 성경 해석의 대원칙이다. 문자적 해석이라 함은 성경이 쓰여 있는 그 언어 그대로 이해하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었다고 하면, 그냥 만나를 먹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셨다면 그렇다고 믿으면 된다. 소돔 땅에 유황불을 내려 멸망시켰다면 불로 멸망시키셨다고 믿으면 된다. 예수님께서 구름 타고 오신다면 구름 타고 오신다고 믿으면 된다. 천 년 동안 다스리신다면 천 년 동안 다스리신다고 믿으면 된다.

혹자들은 성경이 영적인 책이기에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에 의해 문자 뒤에 숨어 있는 더 깊이 있는 뜻을 영적으로 찾아 내어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되면 성경 해석은 100이면 100사람 모두 다르게 되어 버린다. 그러한 사람들이 하는 말은 성경의 어떤 언어들은 비유적, 또는 상징적인 언어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비유로 말씀하시곤 했다(마 13장).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은 비유나 상징적 언어 또한 문자적인 해석에 바탕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1:13,16에는 일곱 촛대와 일곱 별이 나온다. 도대체 촛대가 뭐고 별이 무엇인가? 이 단어가 상징적인 단어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갖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으나, 성경은 이에 대해 친히 해석해 놓는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네가 본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계 1:20). 여기에 대해서도 일곱 교회가 무엇이고 천사는 무엇이냐고 물으면 안 된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교회이고 천사들이기 때문이다.

또 있다. 마태복음 13:33에는 누룩이 나온다. 도대체 이 누룩이 무엇인가? 잘 알다시피 마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해 주신 내용이기에 이 단어는 비유로 풀어야 한다. 보통 신학자들은 이 비유의 언어("누룩")를 "복음"이라고 한다. 왜 복음인가? 도대체 어떤 영적인 사람이 영적인 언어를 얼마나 영적으로 이해했기에 누룩이 복음으로 둔갑한 것인가? 거기에는 어떠한 해석 원칙도 없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친히 이 누룩이 무엇인지 해석해 주고 계신데, 그것은 마태복음 16:6,12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과 같이 "거짓 교리"이다.

결국 어떤 비유적, 상징적인 언어도 문자적인 해석 원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세대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 중 하나는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 같은 책들이 상징적인 언어들로 기록되었다고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은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언어들이고, 상징적인 언어들은 그렇게 많지 않으며, 그 언어들도 문자적인 해석 원리에 따라 해석하면 쉽게 해결된다. 오히려 성경의 문자적 해석 원리는 다른 책들보다 예언서들에서 더욱 분명하게 지켜져야 한다. 예언이 상징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상징적으로만 재림하시게 된다. 그리고 그 재림의 방법도 수백 가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문자적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의 재림은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 눈에 보이게 문자적으로 재림하신다.


교리적 적용과 영적 적용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교리적인 적용이다. 성경을 이와 같이 문자적으로 해석했을 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 즉 역사적 적용과 영적 적용과 교리적 적용이다. 역사적 적용은 그 구절이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에 적용되는가 하는 것으로, 역사책과 비교해 보면 되는 것이니 별로 어려울 것이 없고, 중요한 것은 영적 적용과 교리적 적용이다. 영적 적용이란, 한 마디로 말해, 우리가 영적인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을 말씀한다. 이는 로마서 15:4에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이는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소망을 지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교훈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에서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좋은 설교를 듣는다. 출애굽기와 역사서와 시편과 예언서들에서도 좋은 영적 양식을 먹는다. 심지어 율법의 규례들에서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며, 왜 그와 같이 말씀하셨는가를 깨닫는 가운데 훌륭한 영적인 교훈들을 얻는다. 영적 생활의 원리들도 깨닫는다. 하지만 영적 적용에서는 직접적인 명령, 즉 규례화된 명령은 얻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우리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지 거기에서 영적인 "교훈"을 발견하고, 오히려 정확한 지침은 신약에서 발견한다.

반면 교리적인 적용은 신학적인 체계를 정확하게 세워 줌과 동시에 직접적인 명령을 한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율법 하의 백성들에게 교리적인 명령이 된다. 그들이 이 명령을 행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서 끊쳐지게 된다. 그들은 범죄하면 동물을 죽여 제사를 드려야 했다. 만일 그들 중에 누구라도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육체가 하나도 없어.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한 거야. 더욱이 머지않아 메시야가 오실 텐데 뭐. 나는 메시야를 소망하는 믿음이 있지."라고 말하며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그의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약성경은 신약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리적인 지침이 되지 못한다. 구약의 구원론이 다르고 신약의 구원론이 다르다. 신약 성도들에게 합당한 교리적 지침과 명령이 되는 책들은 신약 서신들, 즉 로마서부터 빌레몬서에 이르는 바울 서신들과, 일반 서신들의 일부이다. 우리가 산상 설교(마 5-7장)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오른손이 범죄하면 자르지 않고도 전혀 죄책감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그것은 산상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내용이 교리적으로 신약 성도들에게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구절들은 각기 교리적인 지침이 된다. 하지만 모든 지침이 신약 교회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구절들은 구약 유대인에게 교리적 명령이 되고, 어떤 구절들은 신약 교회에게, 어떤 구절들은 환란 성도들에게, 그리고 어떤 구절들은 왕국 시대에 지켜야 할 교리적 명령들이 된다. 이것은 영적인 적용과 별개이다. 우리는 산상 설교를 통해서도 훌륭한 설교들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내용들을 신약 교회에게 주는 직접적인 명령으로 제시하면 안 된다. 그것은 다른 경륜 속에서 지켜져야 할 명령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다른 경륜 속에 있는 명령들을 지키려 할 때 헛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요, 또 교회 시대의 경륜에 속해 있는 명령들을 어기려 할 때 범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교리적 적용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도 가질 수 없다. 성도들의 부활에 대해서도 어떠한 소망도 갖지 못한 채 살아 갈 것이다. 구약성경이나 환란 서신들을 교리적 지침으로 삼을 때는 구원의 확신도 갖지 못한 채 살게 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 앞에 신실한 청지기로 발견되기 위해서도 필히 해야만 하는 것이다. 자, 우리는 앞으로 이 모든 경륜들과 그에 따른 교리적 지침들, 그리고 예언의 문자적 성취들을 공부해 나갈 것이다. 이 모든 공부에 앞서 독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이다. 성경의 어떤 구절도 액면 그대로,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어떠한 지식이 나열되어도 그에게는 결코 영적인 지식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김기준형제 성경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