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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기독교

무질서한 은사주의 - 존 맥아더

01. 기적의 시대는 어떻게 되었는가?

기적이란 하나님이 인간 행위자를 통해 이루시는 특별한 사건, 자연의 힘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다. 기적의 목적은 언제나 기적을 목격하는 이들에게 특정한 계시를 선포하기 위해 하나님이 택함 받은 도구가 된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많은 오순절주의자와 은사주의자는 자신들의 운동을 ‘신약 시대의 성령의 능력’의 회복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들은 사도들이 1세기에 행한 일들을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일까? 그렇다면 왜 현대의 계시, 환상, 방언, 치유, 기적은 사도들이 행한 일들과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일까? 사도들이 사라진 이후 무려 1900년 동안 기적, 치유, 표적, 기사는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 기간 동안 성령은 아무 활동도 안 하셨는가? 아니면 그 세월 동안 성령의 능력은 비주류 집단과 광신자들에게만 나타났는가? 오늘날 신자들은 정말로 초대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기적, 치유, 부활을 일으킬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려면 성경에서 기적들이 언제, 왜 일어났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 글부터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02. 하나님은 언제, 왜 기적을 사용하셨는가?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적은 성경의 역사에서 비교적 짧은 세 시기, 즉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 엘리야와 엘리사가 사역하던 시기, 그리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에 일어났다. 이 세 시기는 모두 백 년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또한 이 세 시기에는 다른 시대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세 시기 동안에도 기적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일어난 기적들도 모세와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 예수님과 사도들 등 특별한 하나님의 사자였던 인물들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세 시기를 제외하면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전부 개별적인 사건이었다. 예컨대 이사야 시대에 하나님은 산헤립의 군대를 초자연적으로 물리치셨고(왕하19:35-36) 그 뒤에 히스기야를 고치시고 해의 그림자를 뒤로 물러나게 하셨다(20:1-11). 다니엘의 시대에도 하나님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풀무 불 속에서 보존하셨다(단3:20-26). 그러나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대체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실제로 기적의 시대는 세 차례 있었지만 앞의 두 시대는 세 번째 시대와는 달랐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는 특별한 시대였다. 구속사 전체를 놓고 봐도 일어난 기적의 수에 있어서 다른 어떤 시대도 이 시대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이 시대에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질병이 사실상 퇴치되었다. 매일같이 귀신들이 쫓겨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 이 기적의 시대에 일어난 수없이 많은 기적은 처음 두 시대를 훨씬 능가한다. 선지자들이 말씀을 선포하고 기록하는 사역을 했던 구약 시대 전체에 걸쳐 이 시대에 필적한 만한 시대는 없었다. 새 언약의 진리와 그 진리를 담은 신약 성경이 반 세기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에 한꺼번에 선포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진리를 입증하는 기적들을 유례없이 많이 허락하셨다. 그와 같은 시대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있으리라고 추측할 이유가 전혀 없다.

초자연적인 일들은 구약 시대 내내 계속되었지만 인간이 행위자로 개입된 기적은 극히 드물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 내는 기적은 더더욱 희귀했다. 그것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유대인들 사이에 그토록 놀라운 일로 여겨진 이유 중에 하나였다.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조차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소유한 그런 능력-어떤 사람이든 다 고칠 수 있는 능력-은 보여 주지 못했다(눅14:40;행5:16).

구약 성경의 기록을 잠시만 살펴보면 우리가 앞에서 열거한 인물들-모세, 여호수아, 엘리야, 엘리사-을 제외하고 초자연적인 일을 일상적으로 행한 사람은 삼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적을 일으킨 인물들에 대한 한 삼손은 거의 모든 범주에서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삼손은 어떤 위대한 진리도 가르치지 않았다. 사실 삼손을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가르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불성실했고 비도덕적이었다. 그의 유일한 역할은 이스라엘을 보존하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능력은 특별히 그러한 사명을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 기록으로 남은 역사 속에서 다른 누구도 삼손과 같은 육체적 능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

삼손은 은사주의자들이 갖고 싶다고 말하는 기적적인 증거의 모델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도 시대를 재현할 가능성보다는 또다른 삼손을 일으키실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물론 하나님은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든 초자연적으로 역사의 흐름 속에 개입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로 기적을 세 시대에 집중시키고 그 외의 시대에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끔씩 허락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 밖의 시대에 하나님은 주로 섭리를 통해 역사하신다.

적어도 성경에 나타난 기적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은 왜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셨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1. 기적은 새로운 계시의 시대를 알렸다.

세 기적의 시대는 모두 하나님이 기록된 계시-성경-를 상당히 많은 분량으로 주신 시대다. 그러한 기적들은 본질적으로 계시의 한 시대를 예고하는 기적들이었다. 모세는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썼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선지자의 시대를 알렸다. 사도들은 거의 모든 신약 성경을 썼다. 심지어 다른 시대에 일어나 보기 드문 초자연적인 기적들도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하신 인물들과 관계되었다. 히스기야의 치유에는 이사야가 관련되었고 풀무 불에 던져진 세 사람도 다니엘의 친구들이었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 주도록 설득하고자 많은 기적을 행했다. 기적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떠나 광야를 지나가는 여정에 늘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이 수여되는 동안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처음으로 모세에게 임했을 때 모세와 하나님과의 만남에는 모세 자신조차 두려워 떨 만큼 극적인 표적들-불, 연기, 나팔 소리, 우레 같은 음성-이 동반되었다(히12:18-21).

최초의 위대한 계시의 시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모세는 모세오경 전체를 기록했고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책을 기록했다. 다른 책들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 이후에 간헐적으로 추가되었다. 예컨대 사무엘은 아마도 사사기와 사무엘 상, 하를 썼을 것이다. 다윗은 시편의 대부분을 썼고 솔로몬은 지혜 문학의 대부분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런 책들에도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에 특별히 쏟아진 많은 기적이 수반된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의 주요한 일련의 기적적인 사건들은 또다른 새로운 계시의 시대, 즉 구약의 선지자들의 시대와 더불어 찾아왔다. 솔로몬 시대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북왕국(이스라엘)과 남왕국(유다)으로 분열되었다. 북왕국은 곧 우상 숭배로 인해 타락하기 시작하여 아합 왕 시대에는 타락이 극에 달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일으키셨다.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선지자의 직분은 많은 극적인 기적을 통해 확립되었다. 그들의 뒤를 이은 선지자들은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의 모든 책을 기록했다.

그 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 시대 직전까지 거의 4백 년의 기간 동안 아무런 계시가 없었다. 구약 시대의 그 마지막 기간 동안에는 아무도 예언하지 않았고 아무런 기적도 기록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신약 시대이자 세 번째 기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대동안-서기 33년부터 96년까지-하나님은 신약 성경 전체를 주셨다.

​2. 기적은 계시의 전달자들을 확증해 주었다.

모든 기적은 하나의 중요한 목적에 기여했다. 기적은 단지 신적인 과시가 아니었다. 기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선지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입증했다. 예컨대 모세의 기적들은 먼저는 파라오에게, 다음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가 하나님의 대언자임을 확증했다. 기적적인 증거들은 이처럼 기록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적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내용에 대한 확증이었다.

모세와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모두 빈번한 표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했다. 이런 기적들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이들과 함께 계시며 이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열왕기상 17장에서 엘리야는 한 과부의 죽은 아들을 되살려 냈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렇게 말했다.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17:3). 그러자 그 과부는 어떤 반을을 보였는가?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17:24).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대면하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도전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10:24-25). 분명히 예수님의 기적은 하나의 목적에 기여했다. 즉 기적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메시지를 입증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전한 설교에서 군중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적과 표적과 기사로 그들에게 증거하신 분이며 하나님은 그분을 통해 그들 가운데 그런 일들을 행하셨다고 말했다(행2:22). 그와 똑같은 능력은 사도들에게도 있었다.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 사역하면서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셨다(행14:3).

모든 신자에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적을 통해 하나님은 반복적으로-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 예수님과 사도들의 신약 시대에-새로운 계시의 전달자들을 증거하셨다.

​3. 기적은 새로운 계시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메시지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기적을 사용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말씀하실 수 있었다. 이렇게 기적에는 기적 자체의 즉각적인 효과를 넘어서는 교훈적인 목적이 있다.

예컨대 모세가 이집트에서 행한 기적들은 이스라엘 민족과 이집트인이라는 두 집단의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출애굽기 7장에는 모세가 행한 최초의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때부터였다. 그러나 파라오는 완악한 인물이었다. 열 번째 재앙이자 모든 재앙 중에 가장 무서운 재앙-죽음의 천사가 모든 이집트인의 집에서 장자의 목숨을 앗아가는 재앙-이 임하고 나서야 파라오는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을 놓아주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적도 믿는 자들고 안 믿는 자들 모두에게 이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 사실을 그림처럼 잘 보여 주는 예는 열왕기상 18장에 등장한다. 거기서 엘리야는 큰 무리의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4백 명의 바알 선지자를 물리쳤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18:39-40).

신약에서도 기적과 표적은 신자들과 불신자들 모두에게 확신을 주는 데 사용되었다. 그것이 요한복음의 주제였다. 요한복음의 기록된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예수님의 기적과 표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사도들의 기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참조. 행5:12-14).

03. 오늘날에도 기적이 필요한가?

구약과 신약이 완결되었을 때 하나님의 계시는 완성되었다(참조. 히1:1-2). 많은 표적과 기사와 기적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책을 증거하셨다. 아직도 기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뒷받침해야 할 지속적인 필요가 있는가? 아직도 어떤 이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믿음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사람들의 수요에 따라 기적을 행하시는가? 오늘날 방언, 치유, 표적, 기사 등으로 선전되고 있는 현상들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행한 기적과 조금이라도 유사성이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다. 성경의 어떤 구절도 사도 시대의 기적이 후대에도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지 않는다. 또한 성경이 신자들에게 기적적인 성령의 역사를 구하라고 권면하지도 않는다. 신약의 모든 서신서를 통틀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계명만이 신자 및 성령과 관련되어 있다.

“성령으로 행할지니”(갈5:25).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4:30).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성령으로 기도하며”(유20).

신약 성경에 기적을 구하라는 계명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은사주의자들은 신자들을 교훈하기 위해 이목을 집중시키는 기적의 은사들이 주어졌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결론을 지지하는가? 그렇지 않다. 진실은 그와는 정반대다. 방언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2절에서 이렇게 썼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방언은 신자들을 교훈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에 일어난 기적처럼 유대인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진실성을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방언과 치유와 기적은 모두 새로운 계시의 시대를 입증하기 위한 표적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계시의 시대가 끝날 때 표적도 함께 중단되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유명한 설교를 하면서 모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7:36-38). 이 말씀에서 모세의 표적과 그의 “살아 있는 말씀”-하나님께 받은 직접 계시-을 비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 보라. 모세에게나, 엘리야와 엘리사에게나,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나,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사자들이 새로운 계시를 전할 때 표적과 기사를 통해 계시를 더욱 분명히 밝히셨다.

히브리서 2장 3-4절은 선지자들에 대한 확증이 곧 성경적 기적의 주된 목적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리라.”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성경에서 표적과 기사와 기적과 기적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와 사도들(“들은 자들”)의 메시지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임을 증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확증한 바니”라는 말은 과거 시제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헬라어 본문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이것은 곧 첫 세대의 사도들이 새로운 계시의 전달자임을 확증하기 위해 표적과 기사와 여러 능력이 그들에게만 주어졌다는 성경의 분명한 증언이다.

04.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기적을 약속하시는가?

많은 은사주의 신자는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기적을 행하시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는 당신만을 위한 특별한 기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만의 사적인 기적을 구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잘 살펴보면 개인적으로 행해진 기적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시고 그들의 육체적인 고통을 치유하셨지만 그런 일들은 부차적인 은혜에 불과했다. 예수님의 주된 목적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을 확증하는 것이었다(참조. 요20:30-31).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사람들을 치유했지만 그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새로운 계시를 확증하는 일이었다. 새로운 계시는 결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현대의 기적에 대한 주장을 잘 믿는 사람들-특히 오늘날의 표적과 기사를 가장 열렬히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런 신기한 일들이 실제로는 마귀적인 가짜 ‘계시’를 뒷받침하는 것일지도 모를 가능성 내지 확률에 대처하기를 꺼려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실제로 기적적인 표적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의 속임수에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편지들은 그 어디서도 신자들에게 성령계서 표적과 기사로 나타나시는 것을 구하라고 명하지 않는다. 바울은 단지 성령으로 행하라고 말했을 뿐이다(갈5:25). 달리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말했을 뿐이다(골3:16). 다시 말해서 신자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환상과 기사와 표적으로 가득 차 있다. 요한계시록이야말로 요한이 신자들에게 그런 초자연적인 기적을 구하라고 촉구하기에 안성맞춤인 책일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뭐라고 말했는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해 어떤 방편을 계획하셨는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우리가 소망을 원한다면, 우리가 튼튼한 닻을 원한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명으로 인도할 것을 원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필요하다. 로마서 15장 4절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05. 사도들만이 지닌 유일무이한 특징은 무엇인가?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실제로 우리가 오늘날 보고 있는 현상은 하나님이 현대의 사도들을 매개로 새로운 기적으로 입증된 새로운 계시를 주고 계심을 입증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은 사도들의 성경적 역할과 기능을 무시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유일무이한 시대의 특별한 역할을 위한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사도들은 발전해 가는 교회의 기초였다(엡2:20). 교회는 지금 그 기초 위에 지어져 가고 있다. 기초를 다시 놓을 수는 없다. 오늘날의 사도란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적은 사도들 및 사도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동역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나타난 현상이었다. 보통의 그리스도인은 표적과 기사를 행할 능력이 없었다. 바울도 고린도후서에서 그렇게 말했다.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12:11-12).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일부가 분명히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의심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린들에게 자신의 사도 직분을 변호한 것이다. 만일 기적을 행하는 일이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경험이었다면 바울이 자신이 행한 기적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사도 직분을 입증하려 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도 시대에도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이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런 일들은 사도들에게만 가능했기 때문에 바울은 표적과 기사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권위의 증거로 이용할 수 있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자로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었고 바로 그 능력은 때때로 스데반과 빌립 같이 사도들이 사명을 맡긴 사람들에게도 주어졌다(사도행전 6장을 보라). 그러나 그 능력은 더 이상 멀리 미치지는 않았다. 사실 교회가 오순절에 탄생한 그 시점부터 신약 성경 전체 기록 속에서 사도나 사도에게 직접적인 사명을 받은 사람의 면전에서가 아니면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약 성경에서 기적이 그리스도인 신자들 사이에서 아무 데서나 일어나는 모습은 어디서도 읽어 볼 수 없다. 심지어 사마리아인들(사도행전8장)과 이방인들(사도행전10장)과 에베소에 있는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사도행전19장)에게 임한 성령의 기적적인 부으심도 사도들이 그 곳에 오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다(사도행전8,10,19장을 보라).

성경은 반복적으로 사도들은 유일무이한 존재였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사도적 은사와 표적을 부활시키려는 의지가 확고하다. 이들은 심지어 특정한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사도적 직분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도적 직분이 오늘날에도 가능할 수 있다는 개념은 확실히 기본적인 은사주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그러나 사도적 권위의 문제는 은사주의 운동 내에서 약간의 갈등을 일으켰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예언을 말할 때, 그들이 말한 ‘지식의 말씀’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 그리고 그들이 약속한 신유가 실현되지 않을 때, 그러한 사도적 권위에 대한 주장은 의심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은사주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사도적 권위의 계승자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몹시 실행하고 싶어 한다. 그러한 열망은 종종 무서운 권위의 남용을 초래한다. 그런 식의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을 다음과 같은 사도들의 리더십과 비교해 보라.

권위는 은혜롭게 사용되었다. 사도들은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거나 호통치듯이 명령하거나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의 권한을 발휘하기를 거의 꺼려하거나 거북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린도후서 마지막 장에 나오는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의 이런 면모가 잘 나타난다.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13:10).

사도적 직분이 왜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적으로 여섯 가지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

앞에서 잠깐 살펴본 것처럼 사도의 직분은 교회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 이 구절의 핵심이 무엇인지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떤 헬라어 학자들은 이 본문의 가장 좋은 번역은 “사도들/선지자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단어 모두 동일한 사람들을 지칭하지만 “사도들”은 그들의 직분을, “선지자들”은 그들의 역할을 가리킨다.

그러한 견해가 옳든 그르든, 이 구절은 분명히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로 세움 받았다고 가르친다. 즉, 사도들의 역할은 기초와 바탕과 방향을 제공하는 일, 갓 태어난 교회에 기반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그러한 역할은 그들에 의해 성취되었고 그 정의상 결코 반복될 수 없다.

2. 사도들은 부활의 증인들이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자신의 사도직분을 입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전9:1). 고린도전서 15장 7-8절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야고보가 보았고 다음으로 모든 사도가 보았으며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은 결코 입증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부활하신 주님이 출현하신 경우에는 주님이 다락방에 모여 있는 제자들같이 보통 여러 사람에게 단 몇 차례만 나타나셨다. 그렇게 주님이 모습을 드러내신 일은 주님의 승천과 함께 그쳤다. 유일한 예외(참조. 고전15:8)는 바울에게 나타나신 사건이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보았다(행9:1-9). 그 때도 바울 곁에는, 밝은 광채를 목격했고 바울이 부정하기 어려운 초자연적 경험으로 눈이 멀게 된 사실을 안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승천 이후의 독특한 그리스도의 현현이었다. 그리스도는 이후에도 두 번 더 바울에게 나타나셨다(행18:9;23:11). 사도 시대가 막을 내린 이래로 예수님이 누군가에게 나타나셨다는 믿을 만한 증거는 없다.

​3.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개인적으로 택함을 받았다.

마태복음 10장 1-4절은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부르신 사건을 분명히 묘사한다. 누가복음 6장 12-16절도 같은 사건을 묘사한다. 유다는 훗날 주님을 배반하고 자살했다. 유다는 사도들이 직접 행한 특별한 제비뽑기를 통해 맛디아로 대체되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섭리로 제비뽑기를 통해 뽑힐 사람을 선택하실 것이라고 믿었다(참조. 잠16:33).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독특하게 주님을 경험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아마도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말씀하셨을 것이다(이 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이 히브리어로 말씀하셨다면 ‘사도’라는 뜻으로 ‘샬리아흐’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것이다. 히브리어로 ‘샬리아흐’는 그가 대표하는 사람의 대리인, 즉 윗사람을 대신해서 행동할 전적인 권위를 가진 대리자, 대표를 뜻했다. 사도들은 바로 그렇게 예수님을 대신하도록 예수님께 세움 받았다.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고린도후서 8장 23절에서와 같이 다른 사람들도 “사도”라고 불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의 사도’라고 불리며 이는 일반적인 의미를 지닌 비전문적인 용어다. 주님께 개인적으로 보냄을 받은 주님의 사도와 신자들의 무리에 의해 보냄 받은 교회의 사도는 전혀 다르다. 또한 성경에는 어떤 기적도 교회의 사도들이 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도인지 분명히 밝혔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1:1).

원래 열두 사도(맛디아가 후에 유다를 대체함.)와 바울은 교리를 계시하고 교회를 세워야 할 양도할 수 없는 사명을 받았다. 목회 서신에서도 지속적인 교회의 치리를 위한 원칙을 세울 때 장로들과 집사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만 사도들은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4. 사도들은 기적으로 확증을 받았다.

베드로는 성전 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고쳤다(행3:3-11). 그 밖에도 베드로는 수많은 사람을 고쳤고(5:15-16) 죽은 도르가를 다시 살렸다(9:36-42). 바울은 유두고가 떨어져 죽자 그의 생명을 다시 살렸다(행20:6-12). 또한 바울은 독사에게 물리고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28:1-6).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기적은 사도들이나 사도들에게 사명을 받은 이들 외에는 어떤 사람도-심지어 사도 시대에도-행한 적이 없다.

5. 사도들은 절대적 권위를 갖고 있었다.

사도들은 선포된 말씀의 정확성과 신빙성에 딸라 판단 받아야 했던 선지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권위를 소유했다(예컨대 고전14:29-33을 보라). 사도들이 말할 때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사도들은 이미 하나님의 계시의 대리자로 인식되었다. 유다는 교회에 보내는 경고를 담은 짧은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유17).

6. 사도들은 영원하고 유일무이한 영광의 지위를 갖는다.

요한계시록 21장은 새 예루살렘을 묘사한다. 다음 말씀은 그러한 묘사의 일부다.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14절). 열두 사도의 이름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성벽 안에 영원히 봉인되어 있다. (신학자들은 열두 번째 이름이 바울인지 맛디아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논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도들의 이름은 유일무이하다. 그들의 직분은 유일무이하다. 그들의 사역도 유일무이하며 그들이 행한 기적도 유일무이하다. 사도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후임자가 전혀 없었다. 사도들의 시대와 그들이 행한 일은 영원히 과거가 되었다.

2세기에 이르자 사도들은 사라졌고 상황은 변했다. 사도 시대는 유일무이했고 이미 끝났다. 역사가 그렇게 말하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며 신학이 그렇게 말하고 신약 성경 자체가 반복해서 그 사실을 증언한다.

06. 하나님의 능력은 줄어들었는가?

사도행전 5장 16절에서 우리는 교회가 막 시작된 사도 시대 초기에 수많은 사람이 사도들에게 병 고침을 받았다는 내용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사도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도인 바울은 그로부터 25년 후 자기 육신을 괴롭히는 가시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고후12:7-10을 보라). 바울은 한때는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행28:8) 말년이 가까워 올수록 그런 은사의 증거를 전혀 보여 주지 못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위장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씩 마시라고 충고했는데 이는 그 당시의 일반적인 치료법이었다(딤전5:23). 그 후에도 생애 말년에 바울은 한 사랑하는 형제를 병이 든 채로 밀레도에 남겨 두었다(딤후4:20). 만일 바울에게 병을 고칠 능력이 있었다면 바울은 분명히 그의 병을 고쳐 주었을 것이다.

사도행전 앞부분에서 예루살렘은 기적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기적이 기록되지 않았다. 무엇인가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시대의 기적은 후세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없었다. 우리는 기적을 추구하거나 행해야 할 의무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할 의무는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지혜롭고 성숙하게 만들 수 있다. 또한 우리에게는 보이는 대로가 아닌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후5:7).

요한복음 14장 12절은 우리 주님의 다음과 같은 약속을 기록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오늘날 표적과 기사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이 약속은 사도 시대를 뛰어넘어 그들의 집회에서 성취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큰 일”이란 더 극적인 기적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요한복음 14장의 문맥에 포함된 그 어떤 내용도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무엇이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더 큰 일인가? 요한복음 5장 20-21절은 죄인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는 일이 바로 그런 일임을 보여준다. 물론 사도들이 한 일은 예수님의 사역보다 규모면에서는 컷지만 질적으로 그렇지 않았다. 사도들은 자기 시대에 복음을 그 때까지 알려진 땅끝까지 전했다. 그러나 그 사역의 대부분은 기적이 사라지기 시작한 이후에 성취되었다.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기적의 시대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충분한 개념을 신봉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정말 활력을 잃어버리셨을까? 하나님이 과연 2천 년 동안 아무런 중요한 일도 하지 않으셨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주변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증거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전세계 수백만 명의 삶 속에 거듭남의 변화를 일으키시는 데서, 매일 기도에 응답하시는 데서, 섭리를 통해 사람과 자원을 결합시켜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는 데서, 오랜 세월 동안 무자비한 박해와 다양한 내적 공격을 오늘날까지 견지며 살아남은 교회의 활력 속에서, 우리는 그런 증거들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날의 교회에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진 대변인들을 두시지 않았다. 만일 하나님이 그런 대변인들을 두셨다면 그들은 우리가 동영상이나 부흥 성회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소위 기적을 일으킨다는 은사주의자들과는 닮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불건전한 신학을 확증하시겠는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기적의 능력을 주시겠는가? 그런데도 오늘날 기적을 중심 주제로 강조하는 모든 운동은 가짜 신학, 혼란스럽고 모순 된 교리, 노골적인 이단 또는 이 모든 것이 뒤범벅된 상태에 오염되어 있다.

에베소서 3장 20절은 우리 시대를 향해 한 가지 약속을 제사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행하시는 일은 사도 시대에 행하신 일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사도들과 그들의 기적에 대해 특별한 목적을 갖고 계셨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 대해서도 특별한 목적을 갖고 계시며 그 목적은 놀라울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행하시는 일은 언제나 놀랍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