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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성경

성경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들

갓 거듭난 성도들에게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들을 전달하기 전에 성경 자체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심어주는 일이야말로 기초를 다지는 일이요, 신앙 성장의 초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3에 [기초들이 무너지면 의로운 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으리요?]the foundations be destroyed, what can the righteous do?>라고 말했듯이 우리의 믿음과 실행의 초석을 확고히 하는 일이야말로 최우선적인 일입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초신자 때 성경을 읽으면 질문과 의문이 많이 생깁니다. 특히 성경이 비과학적인 것 같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의심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더 큰 문제는 성경을 읽어가다가 자체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들입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듣지 못할 때 성경은 믿음의 책이 아니라 의문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를 읽는데 하루는 과연 지금의 24시간인가?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어떻게 밤과 낮이 존재할 수 있는가? 노아의 방주에는 공룡이 탔는가? 가인은 누구와 결혼했는가?와 같은 질문이 쏟아집니다.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질문을 해 보았고, 또 많은 질문들을 받아 보았습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은 채 <믿기만 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은 질문에 대해 답변해 줄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다 알지 못한다 해도 공부를 해서 가르쳐 주면 될 것입니다. 저도 모든 질문에 다 답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묻는 질문들에 대해서 답해 드리고자 합니다.

 

1. 창세기의 하루는 지금과 동일한 24시간이었는가?

 

▶ 답변:Yes.

성경은 “밤이 되고 낮이 되니”란 표현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첫째 날, 둘째 날...하며 일곱째 날까지 명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낮에 열두 시간이 있지 아니하냐? 사람이 만일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고](요11:9).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을 12시간으로 규정하셨습니다. 그러면 밤도 열두 시간입니다. 한때 진화론과 타협하는 절충안으로 창조론적 진화론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창조 때의 하루는 몇 년일지 알지 못한다라고 했지만 성경은 분명히 하루는 24시간이며 창조는 6일 동안 있었던 일이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2. 태양은 4일째 만들어지는데 그 전의 3일 동안의 밤과 낮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there be light>.

이 우주에는 태양 외에도 많은 발광체가 있습니다. 심지어 태양보다 몇 백배, 몇 천배 밝은 별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양과 별도 있기 전에 빛을 주셨습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21:23에 [그 도시에는 해와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光體)이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태양이 없이 빛이 있던 날은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이 계시는 셋째 하늘에는 태양이 없지만 빛으로 충만합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바 하나님이 바로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빛이 있으라 명하시면 빛은 비취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방에서 작업을 하기 전에 먼저 전원을 켤 때, “전원을 켜라”고 말하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음성 감지 장치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음성이 발해질 때 창조 행위가 바로 이루어집니다(히11:3). 많은 사람들이 어둠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어둠은 태양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결과입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만들고 재앙도 창조하나니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행하느니라.](사45:7,시편 18:11참조).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4일째 이후에나 가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에서 온 지구는 모두 어둠이었습니다. 창세기 1:3에서 온 지구는 모두 빛이었습니다. 창세기 1:4에서 하나님은 어둠과 빛을 나누셨습니다. 지구의 자전은 이 때부터 가능한 것입니다. 회전을 하면 밤과 낮은 자동으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틀째는 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답: 보시기에 좋지 않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틀 째 주님이 하신 일은 물들을 궁창 아래 위로 나누시는 일입니다. 이 물은 지구 상의 바다가 아닙니다. 궁창이 하늘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위에 물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현재 천문학자들에게 이미 밝혀진 사실입니다. 이 은하계를 넘어 지구의 바닷물에 2천 만배에 달하는 물층이 존재한다는 내용이 과학 잡지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99년 1월 8일 미국 우주 항공국은 98년 발사한 스와스(SWAS) 위성을 통해 은하계의 가장 차가운 곳에서도 다량의 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미국 과학자들이 8일 밝혔다. 美매사추세츠州 하버드-스미소니언 천체물리학 센터의 게리 멜닉 연구원은 이날 텍사스州 오스틴에서 열린 미국 천문학협회 총회에서 "스와스 위성은 은하계 성운에 꽤 많은 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고 발표했다... 스와스 위성이 가장 먼저 탐사한 오리온 성운에서 나온 이 자료는 이 성운에 지구 바닷물의 2천만배에 이르는 거대한 양의 물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전에 이미 유럽의 적외선 감지 위성도 최근에 은하계에서 다량의 물이 수증기나 얼음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정보를 보내 왔는데 스와스 위성의 이번 자료는 이를 확인해주는 것이다.” (99/01/08 동아일보). 과학자들이 말한 것보다 훨씬 먼저 욥은 이 물층에 대해서 상세하게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궁창 위의 물들에는 리워야단이 살고 있습니다(욥41:31-32). 이곳은 용들의 처소입니다. 둘째 하늘은 공중 권세 잡은 자들과 영적 악들의 거처입니다(엡6:12-high places). 그래서, 하나님은 좋았더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우주 개발 계획은 전적으로 악한 영들의 역사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늘이 아니라 땅을 주셨고, 대기권까지가 우리의 생활 영역입니다. [하늘과 하늘들도 [주]의 것이로되 그분께서 땅은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주셨도다.](시115:16).

 

4. 성경에 따르면 지구의 나이는 약 6,000년 정도라면 이 우주의 나이와 너무 틀리지 않습니까?

 

▶ 답: 지구의 나이는 6,000년이 아닙니다. 우주의 나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화론이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성경의 창조론은 아주 곤혹을 치르고 궁지에 몰린 것 같습니다. 반면 다시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진화론의 허구성이 입증되면서 창조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창세기의 창조년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길어도 만년 이내로 결론지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지구의 연대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6,000년이라고 하는 것은 임의의 짐작이며, 추론일 뿐입니다. 한가지 정확한 것은 지구의 나이가 태양이나 별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창세기 1:1과 1:3을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논란이 되고 있는 구절이지만 성경을 믿는 초신자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 구절이 해결되면 다른 많은 의문들이 저절로 풀리게 됩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창 1:1). 이 구절과 연관된 구절은 욥기 38:4-7에 나옵니다. [내가 땅의 기초들을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게 명철(明哲)이 있거든 밝히 고하라. 누가 그 치수들을 정하였는지 네가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팽팽히 쳤느냐? 그 기초들을 어디에 고정하였느냐? 그 모퉁이돌을 누가 놓았느냐? 어느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냐?](욥38:4-7). 이 때 지은 땅은 창세기 1:2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지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지음받기 전에 지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 소리를 지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45:18에는 완벽한 참조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하늘들을 창조하신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친히 땅을 조성하고 만들고 견고하게 하였으되 땅을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거하도록 조성하였느니라. 나는 [주]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18). 여기서 “헛되이”(in vain)란 말 창세기 1:2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헛되이 창조하지 않는 땅이 1:2에서 헛되이 있다면 거기에는 무슨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후에 루시퍼에게 이 땅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에스겔 28:13-14은 루시퍼가 바로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었다고 말합니다. 루시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 자였습니다. 욥기38:4,7에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기뻐 소리치는 천사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루시퍼는 절대 천사가 아닙니다. 천사장도 아닙니다. 그는 그룹이었습니다. 이런 루시퍼에게 심판이 임했습니다. 이사야 14:12-15에 심판이 임한 이유와 그의 죄악이 나옵니다. 이사야 14:12을 보십시오. “How art thou fallen from heaven, O Lucifer, son of the morning! how art thou cut down to the ground, which didst weaken the nations!" 루시퍼는 하나님께 받은 "자신의 보좌"(throne)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사14:13).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죄는 아담이 아니라 아담이 지음받기도 전에 이미 루시퍼에게서 발견됩니다. [Thou wast perfect in thy ways from the day that thou wast created, till iniquity was found IN THEE.](겔28:15). 모든 범죄에는 심판이 따릅니다. 하나님은 범죄를 결코 묵과하시지 않습니다. 창세기 1:1에서 창조된 하늘과 땅은 1:2에서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3-7은 당시의 물 심판에 대해서 언급해 줍니다. 성경은 [그 때의 세상],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 앞으로 다가 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언급해 줍니다. 이전 세상의 왕은 루시퍼였고, 그의 왕국은 심판으로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2 후반절부터 물로 뒤덮인 지구에 성령의 운행하심으로 다시 창조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시편 기자는 이 때 성령께서 하신 역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주께서 주의 영을 보내시매 그것들이<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들> 창조되었사온즉 주께서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30). 성경을 지지하고 옹호한다는 과학자들까지도 이 사실에 대해서 무지를 드러냅니다. 물은 언제, 몇 일째 창조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혼비백산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는 출애굽기 20:11입니다. [이는 엿새동안 주가 하늘(창세기 1:1의 하늘이 아니라 창세기 1:8의 하늘이다.)과 땅(창세기 1:1의 땅이 아니라 창세기 1:10의 땅이다)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하늘 안에 있는 것--해, 달, 별; 땅안에 있는 것--동식물들; 바다 안에 있는 것들--어류)을 만들고...](출20:11). 여기에도 물을 만드셨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물은 엿새 동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 과학회의 헨리 모리스 박사와 그의 추종자들은 여기서 걸려 넘어졌습니다. 지구의 나이는 6,000년이 아니지만 인류의 역사는 6,000년 정도가 맞습니다.

 

5.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했는데 이 때 지구상에 다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창4:14).

 

▶ 답: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는 농사를 짓고 양을 칠 정도의 성인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나이가 몇세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들이 100세가 넘어서 이런 일이 터졌는지 30-40세 정도에 살인 사건이 났는지 성경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담과 이브는 창세기 1:28의 명령에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였으며 많은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이들 둘을 기록했을 뿐입니다. 통계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아담이 살아 있을 동안 지구의 인구는 2천만명이 넘었을 것이며, 아담과 셋이 죽기 전까지 지구의 인구는 최소한 1억 3,600만을 넘었을 것입니다. 가인과 결혼한 여자는 조카였거나 동생이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여기에 대한 규례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인이 보복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아벨의 살인자로 자신이 밝혀질 경우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만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 부분에 대해 오해한 사람들이 아담 이전에 다른 족속이 살고 있었다는 주장을 합니다. 아담은 성경이 말하는대로 첫 번째 사람입니다(고전15:45). 이브는 모든 산 자의 어미입니다(창3:20). 이 두 구절은 아담 이전의 다른 사람이 존재했다는 주장들이 비성경적인 상상의 소산물임을 밝혀 줍니다.

 

6. 하나님께서 동물, 식물 등 모든 것들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는데, 인간은 다양하게 만드시지 않으셨는가요?

 

▶답: 인간은 한 종류입니다.

오늘날 다양한 피부색의 인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양한 인종을 창조하시지 않았는가? 아니면 아담, 노아의 단일 후손이 이렇게 다양하고 서로 다른 인종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종류에 따라(after his kind) 지으셨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고로 인간은 다른 종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다른 종류가 있다면 이는 인간이 아니라 변종입니다. 이는 창세기 6장에 나오며, 앞으로 조만간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현재의 모든 인류는 한 피입니다. [또 그분께서 인류의 모든 민족들을 한 피로 만드사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 미리 작정하신 때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으니](행17:26).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새로운 한 무리를 이루게 됩니다.

피부색이 다양하고 다른 체형을 유지하는 이유는 환경, 삶의 습관, 음식등으로 쉽게 설명됩니다. 작은 수족관에서 자란 잉어는 3-4인치 밖에 자라지 못하지만 템즈강에 풀어 놓으면 14-5 파운드의 대형 잉어로 체형이 바뀝니다. 미국에서 자라나는 떡갈 나무와 삼나무는 매우 큽니다. 동일 묘목을 일본에서 키우면 3피트 이상 자라지 못합니다. 앵초류 꽃의 자연적인 본래의 색깔은 노란색입니다. 그런데 말똥 거름으로 재배하면 빨간색이 됩니다. 카나리아의 아름다운 노란 색은 그 새에게 매운 양념을 많이 넣은 먹이를 주면 매우 어둡게 색깔이 변합니다. 백인들을 뜨거운 태양 아래 몇 달간 노출시키면 갈색으로 변합니다. 요한 베로 박사의 색깔과 종족이란 책에 따르면 “머리카락과 눈의 빛은 개개인의 나이와 종족의 나이에 따라 변하며, 중앙 유럽의 일부 몇 지역에서는 빨간 머리카락이 일반적이었지만 지금은 회색 빛을 띤 갈색 머리카락이 일반적이다. 살색은 기후에 따라 변한다.”고 기술했습니다.

 

7.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셨는데 창세기 2:4부터 또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창세기 1장과 모순이 되지 않나요?

 

▶ 답: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은 이 세상과 우주의 창조 과정을 차례대로 6일 동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2:4부터 나오는 내용은 이 세상이 아니라 6일째 사람을 지으시는 과정과 에덴 동산의 창조 과정을 기술한 것입니다. [ [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들을 창조하신 때 곧 이것들을 만드신 날에(in the day) 하늘들과 땅의 생성(生成)이 이러하니라.](2:4). 성경은 분명히 “이것들을 만드신 날”(day-단수)이라고 말합니다. 6일째 하루만을 언급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것을 창세기 1:11 이전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모순된다고 주장합니다. 창세기 2:5,6은 지구의 상태가 아니라 에덴 동산이 들어설 자리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신 후 5,6절의 땅을 9절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또 [주] 하나님께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모든 나무를 그 땅에서 내어 자라게 하시니 그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1장에 창조하신 종류대로의 나무들이 아니라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만 에덴의 동산에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나무와 식물을 만드신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원을 가꿀 때 필요없는 것들을 없애 버리고,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와서 단장을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살게 될 에덴의 동산을 가꾸고 지키도록 환경을 만드신 것입니다. 성경을 예민하게 읽는다면 이 차이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창세기 2:19-20에는 하나님께서 에덴의 동산에서 즉시 “들의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을 지으셔서 아담에게로 데려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름을 짓도록 하시기 위해서 들의 모든 짐승(숲의 짐승이 아님)과 공중의 모든 날 짐승들을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2장의 이 모든 일은 6일째 되는 단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입니다. 흔히 하나님이 6일 째 하신 일을 “인간 창조”라고 단순하게 말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 창조와 에덴의 동산을 만드신 일”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셋째 날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에 만들어졌습니다.



8.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왜 만드셨습니까?

 

사실 이 질문은 모순되는 질문이 아니라 궁금한 사항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인간이 미리 죄를 지을 것을 알았을 것이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을 것을 알았을 터인데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서 인간으로 죄를 짓게 만들었느냐?는 원망과 책임 전가의 본능이 작용하여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는 은행을 털다 잡힌 강도가 재판관을 향해 무엇 때문에 은행에는 돈이 많아서 나로 하여금 강도짓을 하게 했느냐?는 항변과 같습니다.

아마 초신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하는 질문 가운데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에 왜 만드셨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갖가지 추측과 억측, 구구한 해석이 난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하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었다고 만 말씀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만드시든지 전혀 간섭할 수 없습니다.

[왕의 눈앞에서 벗어나려고 서두르지 말며 악한 것 가운데 서 있지 말지니 이는 왕이 무엇이든지 자기가 기뻐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니라. 왕의 말씀이 있는 곳에 권능이 있나니 누가 왕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전8:3,4).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께 창조하신 창조 세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모두 보시기에 좋았으며, 악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31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 그 저녁과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니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좀 자유 방임형으로 무질서하게 생겼더라도 그것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생물들과 무생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싶은 피조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파리는 왜 있는가? 모기는 왜 있는가? 아니면 병균들은 왜 있는가? 이런 질문에 우리는 현명하게 답해야 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인간은 그런 병균들과 파리나 모기, 독충들에게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저주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연 생태계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서로 간에도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땅의 모든 거주민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 안에서든지 땅의 거주민들 가운데서든지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분의 손을 멈추게 하거나 그분께 이르기를, 당신은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4:35).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왜?”라고 따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대신 “왜 인간은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았는가?”와 같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계명조차도 순종하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그렇게 하찮게 여겼는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 나무를 동산의 중앙에 두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일입니다. 이 중에 금지된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지 생명 나무는 아니었습니다. 생명 나무를 통해 인간은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나무는 계시록에서 다시 등장합니다(계2:7,22:2,22:14).

에덴의 동산을 조성하신 하나님을 통해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선하심, 축복은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기는가?에 대해서는 알아 볼 길이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했다거나 말씀을 믿었다거나 사랑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실과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를 가늠해 주는 잣대였습니다.

이 시험은 오늘날도 동일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갈보리 언덕에 높이 세워진 나무가 있으니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무를 통해 인간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인간이 응답할 차례입니다.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이요, 믿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이는 아담에게 주어진 약속과 동일한 약속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를 가늠해 주는 잣대입니다.

 

9. 아담은 언제 죽었는가?

 

창세기 2:17에 따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이는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분명히 먹는 날(in the day that thou eastest)에 죽는다고 죽는 날짜를 명시해 주셨습니다. 반면 창세기 5:5에는 [아담의 전 생애는 구백삼십 년이었으며 그가 죽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둘은 모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에 죽은 것은 영이었습니다. 930년을 살다가 죽은 것은 몸이었습니다. 혼은 불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아닌 영이 죽었음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또한 그분께서 범법(犯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5). 반면 몸의 죽음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영의 죽음과 몸의 죽음에 대해서 안다면 이 둘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말씀이지 모순이 아니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윌슨의 잠언이란 책에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수 십년간 영구차를 몬 운전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님들이 인도하는 장례 예배를 거의 매일 보았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워들은 성경 구절만으로도 삶과 죽음, 구원과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장례 예배를 마치고 오다가 윌슨 목사님과 운전사가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8:22)고 말씀하셨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하고 윌슨 목사님이 운전사에게 물었습니다. 운전사는 이 말에 너무나 당황해서 “그런 말은 성경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람은 20년 넘게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일을 했는데 자신이 죽은 자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가 이 구절을 통해 자신이 죽은 자란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 죽은 자는 영이 죽은 자이며, 자기의 죽은 자들이란 몸이 죽은 자들입니다.

 

10.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했는데 어떻게 거인이 나올 수 있습니까?(창6:2,4).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 알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이들은 홍수 이전에도 있었고, 홍수 이후에도 있었습니다(이들은 다윗에 의해 모조리 죽는다-삼하21:22).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입니다(요1:12). 그러나, 이 아들들은 현재까지 아들로 입양되었지만 실제로 아들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롬8:19). [피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8:19).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년 왕국 동안 그리고 그 이후로 나타날 것입니다. 반면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지상에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들은 욥기 38:7에 언급된 천사들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피조물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예는 아담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3:38에는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 적이 없습니다. 흔히 인용하는 구절 가운데 이사야43:6은 이스라엘 민족을 자녀라고 표현한데서 유래한 것일 뿐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과는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가장 흔한 주석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라고 말하고, 사람의 딸들은 불경건한 카인의 후손들이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셋의 후예들과 카인의 딸들이 결혼하여 거인을 낳았더라”라고 기록할 일이지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이 결혼해서 거인이 태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천사는 성이 없고,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은 성경적 주장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2:30에서 [이는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기 때문이니라.]하신 말씀 가운데 “하늘에 있는”이란 말을 빼면 안됩니다. 창세기 6장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땅에 내려온 천사들(유6)이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천사는 다 남자이며, 날개가 없습니다. 이들은 생식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앞으로 마지막 때에 다시 사람의 딸들을 취할 것입니다.

 

11. 하나님은 후회하실 수 있습니까? (창6:6) 제가 듣기로는 하나님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모순이 되지 않습니까(민23:19, 삼상15:29).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주]께서 땅에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고 또 이로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며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멸하되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날짐승까지 다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을 후회하기 때문이라, 하시니라.](창6:6,7). 사무엘상 15:11을 보십시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이는 그가 나를 따르는 것에서 돌이켜 내 명령을 수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이에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주]께 부르짖으니라.] 그러나, 곧 이어 아래서 사무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강력하신 이는 거짓말을 하거나 후회하지 아니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후회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이다.](삼상15:29).

이런 구절들을 읽고서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말로 회개 또는 후회라고 번역된 repent에는 일반적으로 잘못, 죄, 오류로 인해 빚어진 결과나 행위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단순히 마음을 돌이키다는 뜻이 포함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하다(re/pent)". 하나님은 죄를 짓거나 악을 행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회개하거나 후회하시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반면 인간들이 행한 악과 죄를 보실 때 하나님은 이들에 대해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데, 거기에 대해서 후회를 하십니다. 사람에게 사용된 repent는 악을 근절하고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하나님에게 사용된 repent는 “오래 참으심의 끝”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의미를 안다면 이 구절들은 모순이 아니라 보충적인 의미를 지닌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2. 창세기 9:14은 과학적 사실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모순이 아닙니다. [내가 구름을 가져다가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서 보이면](창9:14). 성경에 따르면 모든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존재한다는 점을 암시해 줍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상에서 하늘의 구름들을 볼 때 무지개를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가끔 비가 오고 난 후거나 일몰 전후에만 잠시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무지개는 사람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기 위한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로 비행할 때 아래 구름을 내려다 보면 쉽게 무지개를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낮에 정원에 물을 뿌릴 때 흩날리는 spray들 사이로도 무지개는 보입니다. 빛이 비추이기만 하면 모든 구름은 그 사이에 무지개를 보여 줍니다. 달빛 속에서도 무지개가 보이며, 밝은 별빛 속에서도 무지개는 관찰됩니다. 지구를 덮고 있는 모든 구름은 항상 무지개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보실 때는 24시간 내내 무지개를 보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찍부터 그 사실을 말해 주었고, 과학은 최근에 그런 현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3. 왜 죄는 함이 지었는데 저주는 가나안이 받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밖에 있는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올려놓고 뒷걸음쳐 들어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덮더니 그들의 얼굴이 뒤를 향하였으므로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포도주에서 깨어나 자기의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니라, 하고](창9:22-25).

여기서 성도들이 자주 제기하는 의문은 두 가지입니다. 어떻게 함이 행한 사소한 실수를 가지고 노아가 무서운 저주를 할 수가 있는가?와 왜 함이 아닌 함의 자식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을 매우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 옷을 다 벗은채 자는 것을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일러 주었을 뿐인데 노아가 일어나서 불같이 화를내며 저주를 했다면 노아의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준행한 노아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이 들킨 사실로 인해 그렇게 화를 낸 것은 아닙니다. 22절에서 함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고”라고 말했지만 24에서 노아는 깨고 나서 그 사실을 안 것이 아닙니다. 함이 눈으로만 아버지를 보고 나갔다면 술에 취한 채 자고 있는 노아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노아는 술에서 깨고 나서 “자기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말합니다. 눈으로 보고 간 일은 자기에게(unto him) 아무 것도 안 한 것이지 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말하는 것은 자기 몸에 함이 무슨 짓을 하고 간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동성연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지 않더라도 성경을 읽으면서 구절과 구절을 비교하면 함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저절로 알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레위기 18:6,7을 펴 보십시오. [너희 가운데 아무도 가까운 친족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나는 [주]니라. 너는 네 아버지의 벌거벗음이나 네 어머니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그녀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네 어머니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지니라.] 이는 근친 상간, 동성연애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노아의 증언과 레위기의 말씀을 통해 창세기 7:22에서 함이 아버지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왜 범죄한 함이 저주를 받지 않았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은 이미 창세기 9:1에서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서 동일한 죄를 보았거나, 미리 앞을 내다 보았음에 틀림없습니다. 함이 아버지 노아에게 하는 짓으로 보아 함의 아들 가나안도 함과 동일한 죄를 범하였거나 깊이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이후로 성경에서 가난안 족속들이 하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과 역사는 동일하게 가나안 족속들의 성적 문란, 동성애, 근친상간, 짐승들과의 교접 등에 대해서 언급하며, 이는 노아의 저주가 매우 정당했음을 입증해 줍니다.

 

출처: https://av1611.tistory.com/1832?category=257451 [❏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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