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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성경

거듭남(구원)에 대하여

육신적인 변화와 결심 등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거나 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더우기 교회생활에 충실하면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께로써 난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것이 중생, 곧 거듭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생, 곧 거듭남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행위와 노력으로 되는 것으로 알고 있거나 신비스러운 것들을 체험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의 어느 구절에서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그런 주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성경의 가르침도 아니다. 또한 영적인 사람의 가르침 역시 아니다. 그러면 누구의 가르침인가?
두말할 것 없이 그것은 사단의 가르침이요. 사단의 속임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이와 같은 가르침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사단의 가르침을 받아왔단 말인가? 사단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그처럼 교회에 충성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그 해답을 제시한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종교인들, 기독교인들이 하나 같이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의 대답이 아니면 아닌 것이다. 더 이상 다른 대답이 필요 없다.
우리는 여기에 대한 대답을 하는 대신 몇 가지 현실적 상응을 제시하고 싶다.
가령 이단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주장이 성경을 인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오직 인간적인 가르침과 교훈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더욱 철저하게 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그들이 더욱 열성적이며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여 헌신하고 있다. 중세기의 로마 카톨릭이 성경을 외면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유는 신약의 전시대를 걸쳐서 성경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기 보다는 인간의 지식과 학문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고 오히려 자신들의 사상과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이용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인류에게 하신 말씀을 마음으로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배척하고 받지 않았을 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므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라고 하셨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성경만을 연구하는 서기관들도 있었다. 성경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하지 못했기에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그 후 사도들의 가르침까지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바로 이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성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가르침, 분별, 지식을 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성경은 한마디로 이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수도 없나니 이는 그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그렇다. 육은 아무리 개선되어도 육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누구나 쌓을 수 있다. 유창하게 설교하거나 기도할 수 있다. 여러 무리들을 잘 가르칠 수도 있다. 그러나 생명은 전할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요3:6).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아직 거듭나지 않으므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생(거듭남)"이란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두가지를 부탁하고 싶다.

그 첫째는 기존의 선입관을 버리고 제시한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둘째는 마음과 귀에 거스릴지라도 끝까지 읽어 주기를 바란다. 마귀는 계속 방해할 것이다. 여러가지 핑계와 이유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읽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면 믿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 중생(거듭남)의 의미

성경은 육과 영의 두 영역을 말하는데 육은 육체에 속한 것을 말하며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말한다.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호흡하며 활동하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육체의 삶이다. 이러한 삶은 공통적이다. 부모를 통해서 태어나면 성장기를 거치게 되고 장년기에 이르러 노쇠현상이 시작된다. 그리고 결국은 그 생명의 끝이 온다. 이것이 육적 생명이다. 육적 생명이란 반드시 부모를 통해서 시작된다.
성경은 또 다른 생명에 관해서 소개하고 있으니 곧 영적 생명이요 육적 생명과 대조되는 것이다. 영적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께로 간다. 이것은 육체의 생명이 땅으로부터 나서 땅으로 가는 것과 현격한 차이이다.
영적 출생에 대해서 성경은 다양하게 그 어휘를 사용하고 있으나 그 대표적인 것이 거듭남, 곧 중생이다. 그런데 오늘날 "거듭나다"라는 말이 너무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사회 일각에서 어떤 변화를 모색할 때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거듭남은 어떤 변화나 개선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인 용어가 죄인들이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육은 아무리 개선된다고 할지라도 "육으로 난 것은 육"(요 3:6)이다.

니코데모라는 인물

우리는 요한복음 3장을 열었을 때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라는 인물을 살펴봄으로서 거듭남이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종파는 유대교의 바리새파에 속하였다 전통적으로 성경을 믿으며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민족주의자에 해당하는 종파였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으로써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 의회였던 산헤드린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지적인 수준으로써는 당시에 존경받는 랍비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선생에 해당되었으며 종교적, 사회적 경험을 많이 쌓은 노년기를 지나고 있었다. 이로 보건데 그는 지식과 인격을 겸비한 존경받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능력 행함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늘로써 오신 분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부족할 것이 없는 인물이었는데 왜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 그가 무엇을 원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을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요한복음 3장 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거듭남에 대한 가르침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같은 것을 추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니코데모는 종교적으로 열심이 있었다. 지식인으로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종교적, 사회적인 지위, 또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지식도 그의 거듭남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에 그리스도 앞에 은밀하게 나아와서 이 문제를 해결받고 싶었던 것이다.

만일 당신이 거듭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께 나아와야 한다. 니코데모가 그러했다. 종교적인 위치와 사회적인 신분과 당신의 경륜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지식과 철학이 있으며 사상과 학문이 있지만 이 문제만은 그것으로 해결되지 못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예수님께 있다. 비록 예수님의 모습은 서른을 갖 넘은 때였지만 니코데모의 백발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와 반대되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크고 웅장한 예배당이 있는 곳에 가야만 문제해결을 하고 축복받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가짜 학위라도 있어야만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웅성거리는 곳이라야 진리가 선포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것들을 선호하신 적이 있었던가? 예수님이 그 문제의 열쇠이듯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성경이 문제 해결이다. 만약 당신이 열쇠인 성경을 사용하기만 하면 간단히 그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맞지 않은 열쇠로 열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들은 결국 헛된 수고만 남길 뿐 결코 열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당신이 만일 그와 같은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는 자라면 당신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계명들을 교리들로 가르치니 그들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9)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당신에게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은 말이 있다. 혹시 당신도 맞지 않은 열쇠로 거듭남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있지 않은가? 영생의 문을 열려고 노력하면서도 열쇠가 되신 예수님을 제쳐두고 당신이 열쇠가 되어 애쓰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볼 일이다 하나님이 당신 앞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당신 자신을 점검해 보라. 아니 하나님이 지금 당신 앞에 계시니 당신의 거듭남의 문제를 진단해 보라. 바울 사도도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고 하셨다.
요한복음 3장 3절의 "거듭남"이란 말은 위에서 혹은 위로부터 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또는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요 1:13)
이 말의 의미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 들이 착각하고 있기를 "모태신앙"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모태로부터 태어난 것은 죄 있는 육신의 모습이다. 죄의 성품을 갖고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 사람이 아무리 선하고 신실하다고 해도 그대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우두머리(괴수)"라고 말했다.

"이런 연유로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롬 5:12).

아담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계보에 속해 있다고 할지라도 죄인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렀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므로 혈통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육신"으로도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것은 사람의 감정이나 느낌, 혹은 생각의 변화 등을 말한다. 혹자는 어느 시점에서 지난 모든 죄를 하나님의 활동사진처럼 생각나게 하셔서 회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런 예가 있는가 살펴보라. 마귀는 교묘하게 우리를 속이고 있다. 사람은 새로운 사건이나 소식을 들으면 감정이 움직일 수 있다.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을 쏟을 수도 있다, 환상이나 헛것을 볼 수도 있다. 이런 것은 오히려 이교도들 속에서 더 자주 나타나는 것이다. 병고침과 방언 등이 최고의 은사로 등장하고 있다.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자녀 곧 거듭남의 증거인 것처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육신으로 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육신을 의지하지 말라. 이것은 거듭남의 열쇠가 아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의 뜻을 거듭남의 증거로 착각하고 있다. 사람의 뜻이란 결심이나 신조 등을 말한다. 실제로 믿어지도 않고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도 오르면서 "믿습니다". "아멘"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아멘"이 연발된다. 그러나 그때의 그 감정이 몇 시간이나 갔는가? 얼마나 그 감정이 오래 유지되었는가? 인간의 결심은 순식간에 변한다. 특히 환경이 변할 때 더욱 그런 양상들이 나타난다. 혹은 하루에도 몇 번씩 결심하고 바뀌곤 한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다. 사람의 결심은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이런 일은 어느 누구든지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만이 자녀라 인정을 받는다. 니코데모는 종교적으로, 혈통으로도 인격적으로도 아무 손색이 없었지만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가운데서 지금까지 혈통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부모가 진실된 교인들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졌기에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믿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 혹은 육신적인 어떤 변화를 믿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병고침을 받았거나 그런 은사를 가졌다고 생각하거나 방언과 환상 등의 신비로운 것을 체험했기에 그것을 거듭난 증거라고 믿고 있는가? 자세히 생각해 보라. 세상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와 같은 신비스러운 것들을 경험하여 귀신들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요즘 어떤 사람들은 점을 치는 일까지 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며 거듭난 증거라는 말인가?

또한 어떤 사람들은 거듭남의 증거가 자기의 종교적인 직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직분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으니 그것이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않아야 한다. 마귀는 항상 교묘하게 속이며 위장을 해왔다. 예수님께서 70인을 따로 세워서 전도를 보내셨다. 그들이 돌아와서 했던 보고와 그 상황을 성경을 기록하고 있다. "그 칠십명이 기쁨으로 돌아와 말하기를 주여 주의 이름을 대면 마귀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하더이다 라고 하니라"(눅 10:17).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이었는가?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이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고 하시더라"(눅10:20).

많은 사람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서 일한다는 이들이 하늘에 대한 관심이 없다. 오직 병고치는 일과 병고침을 받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하는 일들을 얼마나 크게 하느냐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청중들도 근사하고 매끈한 설교를 듣고 일정한 액수의 헌금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자신들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은 전혀 무관심한 모습들이다.
만약 우리에게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이며 이것이 최대의 관심사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당신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었는가?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생각하며 평생을 봉사했는데 예수님은 당신을 알지도 못하실 수도 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예수님은 이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이것은 "결코 알지 못한다", "나는 너를 알았던 적이 없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헌신했던 부류다,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교회에서 칭찬과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정의하셨다. 불법은 죄다.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당신은 여기서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 보라. 그들이 왜 이러한 절박한 가운데 있어야 했던가? 우리는 좀 더 말씀을 살펴본 후 결론을 내리도록 하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다. 이것은 최후에 버림을 받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이 있을 곳이 어디겠는가? 그곳이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 곧 불못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착각에 빠졌던 것을 영원히 후회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입과 머리로만 믿었지 결코 마음으로 믿은 적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그 믿음을 두지 아니한 자들이다, 오직 그들은 행위와 감정과 생각에 그들의 믿음의 기초를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던 사람들이다.
무엇이 그들로 버림을 받게 하였는가? 그들이 충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주를 받아야만 했는가?
그들이 불행한 일을 당한 것은 거듭남을 잘못 알고 있었던 당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면 거듭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위로부터 난 것을 말한다. 모태를 통해서 육신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것, 곧 하나님께로 태어난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원어는 "다시"라는 말과 "출생"이라는 말이 합해진 복합어로써 "다시 출생, 거듭 출생"을 말한다.
모든 인간은 모태를 통해서 태어나 호흡하며 살고 있다. 이것은 육으로 난 것이다. 이제 하나님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이것이 성령으로 난 것이요 거듭난 것임을 말한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글쓴이 : 송재국 (서울도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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